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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CESE OF PYONGYANG
Ⅲ. 순교로 비옥해진 평양교구
1942년 6월 일본에 의해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와 수녀들이 미국으로 강제 추방당하자 1942년 1월 제5대 평양 대목구장 서리로 임명된 노기남 주교에 이어, 1943년 3월 제6대 평양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홍용호 주교를 비롯한 한국인 사제단과 1941년 11명의 첫서원 수녀들을 배출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그들의 선교열정을 이어갔다.

평양교구는 1944년 2월, 일제에 의해 평양 관후리 성당이 징발당하고, 대신 주선해 준 장로교의 산정현 교회로 주교좌 본당을 이동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홍용호 주교를 중심으로 선교사 시대가 아닌 한국인 자립의 시기를 전개했다.
그러나 1945년 조국 해방과 더불어 북쪽에 진주해 온 러시아 군과 공산정권에 의해 또 한 번의 순교시기를 겪게 되었다.

공산정권은 종교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면서도 미신이라 하여 해방된지 1년만에 사찰을 시작하고 기독교 연맹에 속한 몇 명의 목사를 제외한 모든 성직자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교회를 폐쇠시켜나갔다. 홍용호 주교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제에 의해 헐린 관후리 성당 터에 1946년 8월 명동대성당보다 폭이 열두자 더 크고 길이는 같은 평양 주교좌성당 건립을 시작하여, 1947년 12월에 상수구리에 있던 주교좌 본당을 옮겨왔다. 공산당은 1948년 12월 관후리 성당 건물을 평양 인민위원회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자 박해가 시작되었다. 1949년 5월 홍용호 주교가 피랍되었고, 6.25 전쟁 직전까지 모든 천주교회 사제들이 체포당하였다. 이 때 끌려간 신부들은 평양교구 14명과 분도회 이춘근 신부, 춘천교구 김교명 신부 등이었다. 그 외에 신학생, 평신도, 어린 복사들도 함께 수난을 당했다. 이 시기에 공산 정권은 천주교 재단 학교를 전면 폐지하고 종교 재산을 몰수했다.

메리놀 회원들이 추방당하기 전 메리놀 회원인 장정온 악니다 수녀 M.M 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원장으로 임명하여 수도회의 자립을 돕게 한 오세 (W.O; Shea) M.M. 교구장의 배려로 수녀들은 장 악니다 수녀님의 지도아래 한국인 성직자들의 사목을 도우며 평양교구와 운명을 같이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1950년 5월 14일 수녀원 건물을 압수하고 수녀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공산당에 의한 박해는 6.25 한국 전쟁으로 더욱 심해졌다. 1950년 10월 전쟁중에 장정온 악니다 수녀 M.M.와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서원석 요셉 수녀는 공산당에 납치되었다. 같은 해 10월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평양이 탈환된 후 월남했던 강현홍 신부와 남한에서 서품받은 장선흥 신부등이 평양으로 올라왔고 흩어졌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수녀들은 다시 모여 평양 대목구장 서리로 임명되어 온 캐롤(G. Caroll 安) 신부 M.M. 를 주축에서 시작한 교회 재건 사업에 협조했다. 그러나 1950년 11월 중공군 개입으로 평양을 다시 철수해야만 했고 12월 신변의 위험을 느낀 신자들과 수녀들 그리고 사제들은 남하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