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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CESE OF PYONGYANG
  1. 페트릭 번 주교
  2. 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
2. 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
1906년 8월 24일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 감 6리 살구재에서 출생.
어렸을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천 공립 보통학교 5학년때 어머니도 돌아가시자 감칠리 누님댁 으로 옮겨 보통학교를 마쳤고, 1920년 9월 13일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꾸준한 노력으로 성취시키곤 하였는데, 이때 특히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 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2)
1933년 5월 25일 평양 관후리 성당에서 원 주교 주례로 사제서품을 받았고, 관후리 보좌로 사목생활을 시작했다.
1934년 1월 1일 가톨릭 연구사 사장을 겸임하고 1936년 3월에는 교구장 비서, 1936년 8월부터 12월 까지 영유 주임을 맡았다.

1939년 순천 본당 주임, 1942년 2월 교구장 서리 직무대행 .
1943년 3월 평양교구 제 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성격은 강직하면서도 인정이 많았으며 과감하게 자신의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였고, 자신의 고통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신학생 때 겨울에 제대로 옷을 입지 못해 온몸이 얼어들었어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잘 참아냈다고 한다. 이렇게 청빈을 몸소 실천하셨다. 3)

홍 주교는 아이들 그중에서도 복사들을 특별히 아꼈었는데 이는 성소개발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복사로 홍 주교와 대면했던 이들 중에는 그분께 감화를 받아 사제의 길을 걷게 된 이들이 적지 않다. 또한 훌륭한 문장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가톨릭 조선'의 주필로 문서 선교를 개척하였고, 가톨릭 연구 등 가톨릭 교리 보급과 문화를 소개하면서 일본의 압제 속에서도 우리말 보급에 앞장서며 문맹퇴치에 힘썼고, '평양교구 봉헌문'을 지어 교구 신자들이 한 마음이 되어 기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제들의 정신무장 및 성직자로서의 자세확립을 위해 사제들의 묵상회와 피정등을 가졌었으며, 신자들의 영적 성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성소 개발에각별한 정성을 기울여 1945년 봄에는 덕원 신학교에 중등과 12명, 고등과 2명,그리고 2명의 신학과 신입생이 있게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에 빼앗겼던 관후리 주교좌 성당 부지를 재단 사무장겸 비서인 강창희가 암살당하는 힘든 투쟁 끝에 되찾고 온 교구민을 독려하며 동참을 이끌어 새로이 대성당을 건축했는데, 이때 정초식에서도 '평화의 모후이신 성 마리아께 바치는 봉헌문'을 친히 작성 낭독 하셨다.4)

영원한도움 성모수녀회 수녀들에게는 '하느님께서는 악인들의 죄를 선인들이 기워 갚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수도자들은 불가불 더 많은 고통을 당해야한다'고 하시며 격려하셨다.
1948년 12월 헝가리 민센티 추기경이 체포되어 국사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소식을 접하고는 순교의 결의와 교회가 맞을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각오를 다지는 비장한 모습을 보여 주셨다.
1949년 5월 4일에는 덕원의 신 주교님의 요청으로 덕원에 갔다.
이때 신 주교는 교회에 대한 박해가 날로 심해가니 만일 자신이 체포되면 자신의 교구를 보살펴 달라고 요청했다. 1949년 5월 9일 예견한대로 신 주교님과 몇 신부님들, 수도자들이 체포 구금되고 수도원 마져 빼앗기자 홍 주교는 이에 대한 항의문을 북조선 내무상에 보냈다.
1949년 5월 14일 서포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첫 종신 서원자 면담을 하러 간 사이 내무부로부터 면담하자는 소식이 전해지자 홍 주교는 이 소식을 듣고 평양으로 되돌아오다, 소식을 전하러간 두 학생과 함께 체포, 투옥 되었다.

그 후 부감목 김 필현 신부가 백방으로 노력하여 알아본 바에 따르면 홍 주교는 증언에 의하면 당시 정치범 수용소에 죄를 짓고 수감되어 보일러 일을 하던 흥남 출신 인민군 소좌인 서규석이라는 사람에게서 듣기를 그 수용소 안에 ‘특사’라고 하여 지도자급 인사들을 따로 가둔 곳이 있는데 그곳에는 조만식 선생을 비롯하여 천주교의 홍 주교와 신부들, 그리고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6)
그런데 김일성의 러시아어 통역을 거쳐 북한 외무성 제 1부장을 지냈던 박길룡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10월 18일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급히 퇴각 하게된 북한의 지도부 결정에 따라 북한 내무성 정보처 한규만 소좌등에 의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조만식선생과 정치범들을 총살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조만식 선생과 같은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홍주교와 사제들은 이때 함께 처형되었음이 틀림 없다.7)

2)오기선 신부 증언 1983.3.7
3)윤건희 모이세 증언 1986.1.15
4)천주교 평양교구사 p168 - 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