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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CESE OF PYONGYANG
  1. 장정온 악니다 수녀(M.M.)
  2. 서원석 요셉 수녀
1. 장정온 악니다 수녀(M.M.)

1906년 9월 26일(음력) 경기도 인천시 화촌동에서 장기빈 레오와 황 루시아의 7남매중 4째(차녀)로 출생. 세례명은 마리아이다. 어려서부터 모든 언행이 나무랄데 없었고, 순명과 정직, 인내는 특히 뛰어났다.
1922년 3월 숙명여고 보수과를 졸업하고, 그해 5월 미국 메리놀 수녀회에 입회하였다.68) 메리놀 수녀회 수련소에 들어갈 때 "왜 수도생활을 하려 하는가? 장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때 "거룩한 사람이 되고, 내 나라와 민족을 돕고 싶다"라고 하였고, "어떠한 일이든지 하고 싶다"라고 하였다. 1925년 4월 30일 '악니다'라는 수도명으로 첫 서원을 한 후 그해 10월 첫 소임지로 한국에 파견되어 자신의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고 전념하였다.

한국 최초의 방인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평양교구에 창설되자 한국인 회원 양성의 중책을 맡았다. 그녀는 이때 말보다 실천적 모범으로 회원 양성에 열성을 다하였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하여 여러 가지 기도문과 영적 도서를 번역,69) 수녀들의 기도생활에 도움을 주었음.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성 이냐시오의 'Anima Christi'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기도문'에 실어 주간 기도로 바쳤고70)지금까지 수도회가 즐겨 바치고 있다. 특히 초창기 수련자들을 가르칠때 표어로 삼은 말씀은 'Sursum Corda'였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드높여' 하느님께로 향하라는 이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영적 기반이 되고 있다.71)

1941년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메리놀회원들이 일제에 의해 추방되게 되자 당시 평양교구장 O'Shea주교는 설립된지 얼마되지 않은 방인 수도회의 장래를 위해 같은 한국인 장 악니다 수녀(M,M)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원장으로 임명하여 한국에 남도록 하였다. 장 악니다 수녀는 전쟁의 공포속에 동료 수녀들을 떠나보내고 순명으로 홀로 남아 그치지 않는 열성으로 방인 수녀회 회원 양성에 혼신을 다하였다. 영적도서를 계속 72), 수녀들의 영신생활과 전교활동을 돕기 위해 매월 2회 회지 'Sursum Corda'를 창간하여73) 수녀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으며, 각자의 사도직에 파견되어 있으면서도 수녀들의 마음이 모원으로 향하게 하였다74)

그녀는 이렇게 메리놀 회원들과 떨어져 방인 수녀회 회원들과 지내다 1946년이 되어서야 당시 남북으로 그어진 3.8선을 넘어 비밀리에 몇 번, 남한에 다시 진출한 메리놀 회원들을 통하여 모원과 연락이 가능하게 되었고 경제적 원조도 받을 수 있었다.

1949년 5월 홍용호 주교를 위시해서 성직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고 사태가 급박해지자 1949년 6월 메리놀 수녀회 총장 골롬바 수녀는 미국 본부로 귀원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편지를 보냈고, 계속적으로 장 악니다 수녀가 월남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본원으로 쓰고 있던 예전 메리놀회 서포 본부 건물을
양도하라는 북한 당국의 강요와 여러 어려운 상황으로 더 이상 공동생활이 힘들게 되어 수녀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하였고 1950년 5월 14일 수녀회를 임시 해산하였다, 이때 장 수녀는 그때까지 본당 신부가 체포되지 않고 있는 분원의 수녀들은 그곳으로 돌아가도록 했고, 본당 신부가 체포된 본당의 수녀들은 본가로 귀가하도록 하였으며 . 강 베드로 수녀에게 뒷수습을 부탁하고 남하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녀들은 목자없는 교회를 지키고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소임지 본당으로 돌아갔고, 수녀들의 임시 연락처는 강 베드로 수녀의 본가로 정하였다.75)

장 악니다 수녀는 1950년 5월 14일 오후 남하를 도와줄 안내자를 만나기로 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강 베드로 수녀와 변헬레나 수녀와 함께 평남 대동군 재경리면 송림리 공소에 피신하였다가 1950년 10월 4일 공산당원에 피랍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장 악니다 수녀와 함께 활동했던 메리놀회 가브리엘라수녀는 '장 악니다 수녀는 자기 민족을 위한 진정한 봉사와 헌신으로 치명자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분이었다'고 회고 했다.76)
이때 장 수녀는 디스크 수술 후였기에 걷지를 못하는 상황에서 누운 채 소달구지에 실려 끌려갔다. 장 수녀는 건강도 좋지 않았고 오빠인 장면 박사의 유엔에서의 북한의 종교박해에 대한 비난 연설 등으로 오래 생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최근에는 장 수녀님의 시신을 서포 우물에 밀어 넣는 것을 보고 밤에 꺼내 그 근처에 매장했다고 증언하는 이가 있어 장정온 수녀는 전쟁의 혼란 속에 처형 되었음이 틀림없다.77)

68)김옥윤 마리아(장 악니다 수녀의 오빠 장면 박사 부인)증언 1982.11.6
69)번역서; ‘수도자의 모범이신 예수’(Jesus the Model for Religious),서원문답(The Catechism of the Vow)
70)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기도문 p62-63
71)강 베드로 수녀의 증언기 p9-15
72)번역본 중 자필노트 ‘소화 데레사와 함께 피정을’이란 번역본은 현재 수도회에 보관하고 있음.
73)당시 회지 ‘Sursum Corda’는 수녀들이 남하할 때 가지고 오지 못하였으나 1969년 12월 남한에서 월간 회지로 복간했고, 1971년 10월 호부터‘영원한 도움’으로 개정하여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음.
74)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p479
75)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p110, 117-118
76)강 베드로 수녀의 증언기 p45-49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1983년) p37-40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40년사 (1972년) p37-40
77)장영진 세바스티안의 증언(그의 어머니 최정식 아가다의 체험 전달) 2011년 3월 30일 서울 성모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