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홈 서울대교구 | 가톨릭정보 | 뉴스 | 메일 | 갤러리 | 자료실 | 게시판 | 클럽 | UCC | MY | 로그인
DIOCESE OF PYONGYANG
  1. 이규식 베드로   3. 서경석 마르코   5. 최삼준(최자백)프란치스코   7. 송은철 바드리시오
  2. 서정요 프란치스코   4. 강창희 야고보   6. 강유선 요셉   8. 김운삼 요셉
1. 이규식 베드로

1923년 10월 9일 평안남도 강동군 원탄면 상리 35에서 이동복 바오로와 이동춘 막달레나의 1남 2녀의 장남으로 출생. 1939년 4월 9일 부모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강동군 상리 초등학교를 다니다 평양 동평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2년간 동평학교 급사로 일했는데 매사에 성실하고 근면하였고, 늘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을 감동케 하여 김필현 신부는 수사와 같은 인상을 풍기는 이규식을 수사 아니면 사제로 키울 생각을 하게 되어 일본 나가사키로 유학을 주선했다. 이규식은 나가사키 가톨릭 재단인 도오리쥬 중학교를 다녔고, 이때 학비는 물론 일체 모든 비용을 김필현 신부가 부담했다. 이는 김필현 신부가 그의 성소와 적성이 교회의 큰 재목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64)

졸업 후 그는 평양으로 돌아와 2년간 성모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과묵하고 순명 잘하며 자기를 드러내기를 꺼려하였다. 그의 무뚝뚝한 성품은 마치 소(牛)같다는 인상을 풍겼고, 말보다는 행동이 앞섰으며 무엇이든 하려하면 꼭 끝을 보았다. 그는 때로 4-5일이나 단식하며 기도하기도 하였다. 입는 옷에도 무관심하여 특별히 갖추려하지 않았고, 집안 식구들 사이에도 남의 말을 하는 것을 못하게 하였으며, 성모학교 출, 퇴근시 눈을 항상 아래로 깔고 묵묵히 조심스런 걸음으로 걸었다.
그리고 항상 말하기를 언제일지 모르나 박해가 일어나면 제일먼저 나가 순교하겠다고 굳은 의지를 보이곤 하였다.
해방직전 성모학교를 퇴임하고 대신리 본당 제의방에 기거하며 교회일을 도왔는데 겨울에는 불기운도 없는 방에서 모든 어려움을 참고 지내는 모습은 그가 마치 수도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그는 신학교에 갈 준비를 하였다. 항상 무릎을 꿇고 묵상하는 그의 기도하는 모습은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 같았다고 한다.65)

그는 1947년 9월 덕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49년 공산정권에 의해 뜻하지 않게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가 몰수되어 평양으로 돌아와 서포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원에 머물며 여러 일을 도왔다. 그 후 평양교구 성직자들이 차례로 체포되기 시작하자 대신리 본당으로 다시와 본당 예수 성심회 청년들과 본당 주임 박용옥 신부를 지키고자했다.
1949년 12월 6일 보위부원들이 박 신부를 체포하기위해 오자, 종탑의 종을 쳐서 이 급박한 상황을 신자들에게 알렸다. 종소리에 신자는 물론 비신자들도 성당으로 모여들게 되자 보위부원들은 종 줄을 끊어버렸으나 이 규식 신학생은 종탑에 올라 종추를 잡고 더 크게 종을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박 신부의 연행이 지연되었다.

화가난 보위부원들은 이 규식을 종탑에서 끌어내어 온몸을 짓밟아 만신창을 만들었다.
이때 달려온 어머니의 항의로 구타는 그쳤고, 친구들이 쓰러진 이규식을 빈 교실로 옮겨 누였다.
목자를 잃지 않으려는 신자들의 필사적인 저항은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도 그치지 않자 박 신부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 스스로 헤치고나가 체포되셨다.
이어 보위부원들은 모진 몰매에 인사불성이 되어있던 이규식에게도 달려들어 끌고 갔다. 이후 그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66) 그러나 이규식은 이때 이미 많은 상처로 몸을 가누지 못할 상태였기에 오래 생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며 가령 살았남았다고 하더라도 국군 평양 입성 직전에 피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67)

66)김릿다수녀(영원한도움의 성모 수도회, 당시 대신리 성당 전교수녀)증언 p18-23
붉어진 땅의 십자탑(장선흥 신부 저 1951,12,8), p 138-141
67) 박태균(서울대 교수), 해방 직후 북한의 종교 정책과 전쟁 전후 실종된 가톨릭 관계자들’, 서울 대교구 시복 시성 자료집, p 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