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5월 18일 평양시 상수구리에서 송성화와 정석인 아네스의 외아들로 출생.
아버지 어머니 모두 초등학교 교사였으며 아버지는 특히 영어실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누나가 하나 있었으나 일찍 사망했고, 어머니도 1940년에 폐결핵으로 사망하여 외조부모와 외롭게 살았다. 말수는 적었고 둥글고 잘생긴 얼굴 이었다고 한다.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 제2중학교를 다니면서 금지되었던 영어를 몰래 개인지도를 받는등 공부에 남달리 열심이었다. 그리고 신자가 아닌 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앗고, 성당마당에서 놀기를 즐겨했다. 1949년 김필현 신부의 심부름으로 서포에 가 홍 주교님께 대성당 문제로 평양시 인민위원장 한면수의 면담통보 소식을 전한 후 감흥리에서 함께 갔던 김운삼과 체포되었다. 당시 같은 감방에 함께 투옥 되었던 김원우의 증언에 의하면 송은철은 함께 체포된 김운삼과 마찬가지로 6개월간 심문을 받으며 배교하면 집으로 보내준다는 회유와 협박에도 끝까지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할 결심을 보여 교화소 내에서 남다른 혹사를 당하였다. 97) 그리고 송은철과 김운삼은 매 식사때마다 성호를 긋고 식사를 하여 대부분이 비신자인 감방 안에서 유별나게 보였다고 한다. 결국 그들의 이러한 행동으로 1949년 11월 경 다른 감방으로 옮겨졌다. 송은철은 김원우가 있던 감방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아 일체 말이 없었고, 앉아 있기에도 힘이 들어 거의 누워 지냈다고 한다. 11월이 되자 감방은 말할 수 없이 추워지는데 송은철은 5월 체포 당시의 학생복 그대로였고, 따뜻한 옷과 이불도 제대로 없어, 더욱 잦은 기침에 힘들어하며 건강이 더욱 악화 되었다고 한다. 송은철과 김운삼이 다른 감방으로 옮겨지고 12월이 되자 감옥 여기 저기서 동사자들이 속출하여 감방 사이의 복도는 하루에도 여러차례 시체를 끌고 나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송은철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때 죽었으리라 여겨지며98) 가령 살아 남았어도 국군의 평양탈환직전에 그들이 갇혀있던 감옥의 수감자들을 총살했으므로 결국에는 처형 되었음이 틀림없다. 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