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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CESE OF PYONGYANG
  1. 이규식 베드로   3. 서경석 마르코   5. 최삼준(최자백)프란치스코   7. 송은철 바드리시오
  2. 서정요 프란치스코   4. 강창희 야고보   6. 강유선 요셉   8. 김운삼 요셉
4. 강창희 야고보

1912년 9월 평안남도 평원군 검산면 신지리(속칭 섭가지) 576번지 교우촌 에서 증조 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을 지켜온 강문홍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강 야고보는
섭가지 공소의 성숙학교(1908년 설립, 교장은 강창희의 조부 강중승),를 거쳐 영유의 사숙 명륜당, 일본 나고야의 동해 상업학교로 진학했으나 1933년 3년 과정 중 중퇴하였다.86)
1934년 순경 시험에 합격하여 중화지방에서 1년간 순경생활을 하였다.
평양교구 출판 사업이 활기를 띠면서 '가톨릭 연구'가 높이 평가 받으며 1936년 6월 전국 주교회의에서 조선 가톨릭 운동의 유일한 기관지로 승격되어 출판 업무가 확장되자 출판업무와 교구재단일을 겸임하던 김구정(이냐시오)이 출판만을 맡고 강창희에게 교구 재단 사무를 맡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회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성품은 침착하고 담력도 있었으며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는 면이 있어 맡겨진 일은 끝까지 착실히 마무리 지었다. 술도 즐겨 김구정 선생이나 동료들과도 자주 술자리를 함께하곤 했다 한다.87)
이렇게 그는 신덕이 깊고, 차분한 성격에 맡겨진 일을 잘 수행하여 오(O'Shea)주교님의 신임을 받았다. 일제 말에 이르러 오 주교님과 미국인 메리놀 회원들이 체포 구금되어 추방 될때 당시 순천 주임이셨던 홍 용호신부와 오 주교간에 오가며 교구 운영업무의 인수, 인계라는 막중한 업무를 극비밀리에 잘 처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일제에 징발 당했던 주교좌 관후리 성당 부지를 되찾는 사업을 착수하며 홍 용호주교는 부감목 김필현 신부를 그 책임자로, 그의 보조자로 강창희를 임명하였다.88)

강창희는 이후 평양시 인민위원회와 투쟁을 하여 반환에 합의를 이끌어 내었으나 평양시에서 보내온 문서는 반환이 아니라 일시적 대여라고 되어 있어 다시금 시 인민 위원회에 항의를 하고 친구인 김현준 요한의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고 주교관 근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다 3발의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홍 주교는 물론 교구 사제들과 신자들은 모두 공산치하의 첫 순교자의 희생을 가슴 아파했다.89)
강창희는 교회대표로 공산당과 맞서 설득력 있는 웅변 등으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여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고, 특히 관후리 성지를 되찾고자 굽힐줄 모르고 대적했던 것은 그들의 더 큰 미움을 사서 희생되고 만 것이다.

86)강창훈 요셉(강창희의 이종사촌 동생)증언 1982.12.1
87)김구정 증언 1983.11.8
88)평양교구사 p180-183
89)강 베드로 수녀 증언 / 내가겪은 공산주의(지학순 주교저)p30-81 /
붉어진 땅의 십자탑(장선흥 신부 저 1951,12,8),p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