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홈 서울대교구 | 가톨릭정보 | 뉴스 | 메일 | 갤러리 | 자료실 | 게시판 | 클럽 | UCC | MY | 로그인
DIOCESE OF PYONGYANG
  1. 이규식 베드로   3. 서경석 마르코   5. 최삼준(최자백)프란치스코   7. 송은철 바드리시오
  2. 서정요 프란치스코   4. 강창희 야고보   6. 강유선 요셉   8. 김운삼 요셉
8. 김운삼 요셉

1934년 6월 29일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일벽리에서 김준성과 정소희 세실리아의 6남매중 유일하게 생존 독자로 출생. 세 살때 아버지가 당뇨병으로 사망하자 박천의 할머니 밑에서 자라며 초등학교를 다니다 그 후 어머니가 평양으로 데려와 함께 살면서 성모보통학교에 전학시켰다. 어머니는 미신에 몰두 했지만 가톨릭 학교를 다니게 된 김운삼은 점차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되고 5학년 때 요셉이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김운삼은 속이 깊고 말수가 적었으며 느긋하고 순한 편이었다. 학교에서는 성격이 원만하고 항상 웃는 얼굴로 친구들을 대했으며 싸우는 모습을 보인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영혼 구령을 위해 교리 문답책을 가져다 드리며 권했지만 핀잔만 들어야 했다. 어머니는 하나 남은 귀한 아들을 위해 소재 날에도 고기를 먹이려했지만 오히려 김운삼은 어머니를 설득시키려 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더 많이 먹게 하면 탐도 죄를 짓는다고 하며 절제 하였다.
기림리 성당에서 매일 미사때 복사를 섰으며 이른 아침 어머니가 못나가게 하려고 이불을 덮어놓으면 어느틈엔가 빠져나가 성당에 가곤 하였다.100)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언제나 먼저 성당에 들러 조배를 한 후 귀가했으며 늘 같은 연배의 학생들과 함께 성당에서 조배하고, 놀고,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주교님과 신부님들 복사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았다. 주교좌 관후리성당 재건 작업이 한창 일 때는 공사현장에서 일을 도와 옷과 손이 형편없이 더러워져 돌아와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게 되면 먼 시골 사람들도 쌀을 가지고와서 며칠씩 묵으며 일하고 있고, 또 어떤 이는 반지도 빼놓고 가는데 저는 이렇게 벽돌이라도 날라야 한다고 대답하곤 했다.
홍 주교님과 최항준 신부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김 운삼은 복사하던 다른 학생들처럼 신학교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성모초등학교 졸업 후 상수구리의 무순 공업학교에 진학하고서도 다시금 어머니께 덕원신학교 가기를 원함을 말씀드렸으나 완강히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성당일을 돕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101)
1949년 5월 14일(음 4월16일) 김운삼의 어머니 생일날 친척이 사온 옷과 운동화를 신고 성당에 나갔다가, 덕원의 신주교님과 성직자들의 체포와 수도원 몰수 등에 대해 북한 당국에 보낸 홍 주교의 항의문에 내무상 박일우가 홍 주교를 만나자는 급보를 보내와 이를 전하기 위해 김필현 신부의 명을 받고 서포로 가서 홍 주교님께 소식을 전한 후 뒤이어 온 송은철 바드리시오와 모두 체포되었다.102)

이후 아들을 찾던 어머니는 아들이 감옥에 갇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일같이 인민 교화소에 나가 아들 소식을 기다리다 날씨가 추워지자 입고나간 옷이 얇고, 이제는 다헤어졌겠다 싶었고, 같이 끌려간 송은철은 어머니가 없어 누가 그 아들을 생각해주랴 싶어 두 소년의 옷을 만들어 감옥에 넣으면 받지 않고 도로 내보내고 하기를 수차에 걸쳐 반복했다. 하루는 역시 감옥 앞에 있다 늦게 집에 돌아오자 집을 지키던 조카딸이 김운삼과 함께 있다 출감했다는 소년이 찾아왔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니 그 소년은 옛 재판소 자리인 정치보위부에 사흘간 김운삼과 송은철과 함께 심사를 받았는데 그 두 소년은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면 내보내주겠다”고 하자 "죽어도 깨끗이 죽겠다"고 버텼으며, 식사때마다 성호를 긋고 기도 하는등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그로인해 김운삼과 송은철을 감방을 옮겨 다른 죄수들과 격리수용하고 괴롭혔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103) 김운삼과 함께 감방에 갇혀있던 김원우의 증언에 의하면 김운삼은 처음에는 홍 주교와 같은 감방에 갇혀 있다가 김원우가 있는 그 감방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김운삼은 그간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와 체포되어와 지금까지의 일들을 소상하게 이야기 해 주었다고 한다. 김운삼은 송은철과 함께 1949년 11월경 다른 감방으로 옮겨졌는데 12월이 되자 동사자들이 많이 생겨나 매일 시체 치우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감방의 현수라는 아이가 문틈으로 복도의 시체 치우는 것을 보다가 김운삼의 시체를 끌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당시 감옥에 들어 올때는 옷의 단추를 모두 떼어야 했는데 김운삼은 교복 차림 이었고, 옷의 모든 단추를 다 떼었지만 소매끝의 단추 하나는 미처 떼지 못하여 달려 있었는데 그날 끌려 나가는 시체의 소매에 바로 그렇게 단추 하나가 달려 있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고 한다. 이때 김운삼은 5월 체포될 당시의 옷 그대로였고, 불기운 하나 없는 감옥에 제대로된 이불과 옷도 지급되지 않아 동사했을 것으로 보이며, 설령 그때 살아 남았다 하더라도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입성을 앞두고 그 감옥에 투옥 되었던 이들을 대부분 총살 했으므로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전혀없다.104)
그 후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희생시킨 사람들이라고 신부 수녀들을 원망하며 지냈고 남한으로 내려와서는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가 다시 아들을 찾고자 했다.
어느 날 꿈에 아들 김운삼이 마당 하나 가득 국화를 피워 가꾸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가 나도 같이 가자 하니 ‘어머니는 아직 오실 때가 안 되었어요’ 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꿈을 깨었다. 그리고 몇 일 후 한 친구로부터 성당에 나가기를 권유받고 아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던 성당이니 거기에 가면 혹 꿈에 본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성당에 나갔는데 마침 성체강복이 거행되고 있었고, 화려하게 꾸며진 제대위에 켜진 촛불들 가운데의 성광이 꿈에 보았던 아들이 가꾸던 국화와 너무도 닮아 그 자리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그러고 있는 가운데 예식도 끝나고 사람들도 다 나가고 혼자 그대로 있었다.

그때 누가 김운삼의 어머니의 어깨를 두드리기에 고개를 들고 보니 그토록 미워하던 수녀였다. 그 수녀를 따라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놀랍게도 그 수녀는 성모학교에서 김운삼을 가르쳤던 이 아네스 수녀였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이 아네스 수녀로부터 교리를 배워 영세했고, 아들이 그토록 되고 싶던 신학생들을 도우며 그동안 아들을 찾는다며 쓰지 않고 모았던 돈을 정릉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본원 성당 신축에 봉헌하고 1984년 7월 24일 사망했다.105)

100)곽성현 요한(당시 학교 친구)증언 1982년11월 9일
101)정소희 세실리아(김운삼의 모친)증언 1982년 11월 9일
102)붉어진 땅의 십자탑(장선흥 신부 저 1951,12,8), p102-103
103)정소희 세실리아 증언 1982년 11월 9일
104)김원우 증언 2007년 6월 13일 - 평양 감옥에 함께 갇혀 있었고, 당시는 신자가 아니었으나
그도 그들이 식사전에 성호를 긋는등 여러 가지로 남달랐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2007년
평양교구 80주년을 맞아 수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 증언하는 시간을 갖음.
그러나 앞서 기록한 정소희 세실리아를 찾아와 증언한이는 다른 사람임.
105)마오로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증언 1982년 11월 6일
정소희 세실리아 증언 1982년 1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