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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CESE OF PYONGYANG
  1. 강영걸 바오로 신부   4. 홍건환 갈리스도 신부   7. 조문국 바오로 신부   10. 석원섭 마르코 신부
  2. 김필현 루도비꼬 신부   5. 홍도근 세자 요한 신부   8. 이재호 알렉시오 신부   11. 최항준 마티아 신부
  3. 박용옥 디모테오 신부   6. 장두봉 안드레아 신부   9. 이경호 안셀모 신부   12.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
1. 강영걸 바오로 신부

1904년 평안남도 평원군 노지면 추흥리 출생 .
강 신부에 대해 증언해줄 가족이나 연고자가 없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용산신학교를 마치고 1931년 5월 30일 민 대주교님 주례로 명동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매우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교회와 주교의 명에는 절대적으로 순명하였다.8) 그리고 무엇인가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끝까지 완수 했으며, 폭넓은 대인관계를 이용 당시 신자들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탄압을 현명하게 극복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9)

서품 후 서포 교구청에 근무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 새로이 진출한 메리놀 선교사들을 도우며 5년간 사목 생활을 하였다.
1935년 7월 귀국하여 중화본당 주임으로 발령 받았다.
1936년 8월에는 빈민 아동 교육기관으로 성심 학원을 개원 문맹퇴치에 힘썼다. 그는 계절마다 수확되는 곡식을 교무금으로 납부 하도록 하여 교회의 자립정신을 심어 주었으며, 또한 본당 청년 활동도 활성화하여 장례가 나면 가난한 교우 집의 장례를 도움으로써 전교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10)

이러한 강 신부의 사목 방침은 그 후 새로이 발령받아 가는 본당 마다 한결같았다.
의주 성당 재임 시에는 일본의 교회 종 헌납 요구를 슬기롭게 넘겨 정 마리아가 헌납한 역사적인 종을 보존할 수 있었고, 운향시 본당에서는 신자 대부분이 일본인들이 개간한 농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농민들이었기에 신사참배 강요로 고통을 받으며 교회 또한 탄압을 받게 되자 용기와 인내심을 갖도록 지도 격려 하였다, 미국인 메리놀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후배인 홍 용호 신부가 교구장이 되자 선배이지만 묵묵히 홍 주교의 명에 순종하며 교구의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남모르게 도우며 협력했다.
1944년 마산본당으로 전근된 후 해방을 맞고 공산주의자들의 감언이설에 흔들리지 않도록 신자들의 영신지도에 힘썼다. 강 신부는 마산 성당에서 운영하던 성모학원 건물에 대한 양도 문제로 공산정부와 대립하다 1950년 6월 24일 오전 9시경 면 인민위원회로 연행되어 평양으로 압송되고, 평양교화소에 다른 사람들과 투옥되었다가 1950년 9월 23일경 유엔군의 북진으로 다급해진 공산군에 의해 같은 감방에 갇혔던 8명과 함께 1950년 9월 23일 총살형에 처해졌으며 그 중 한명이 간신히 살아나 유엔군을 따라 남한에 와서 증언 하였다.11)

8)강현홍 요한 신부 증언 1983.2.9
9)한도준 마태오 신부 증언 1984.10.16
10)김용현(당시 중화본당 신자) 증언 1983.10.24
11)현용국 비오(당시 마산 본당 회장) 증언 1979.5.7